생각

Posted in BookLog // Posted at 2013. 10. 5. 20:12

 

장정일 저 | 행복한책읽기

 

도서관에서 읽고 싶은 책을 고른 뒤, 이곳 저곳을 배회하다 문학코너에 발을 멈췄다.

거의 매주 도서관을 가지만 문학코너에서 책을 고른 것은 손에 꼽을 만하다. 가벼운 마음으로 이책 저책을 골라 몇 단락을 읽어 보다 맘에 들어 빌려온 책이다.

 

책의 부제는 '장정일 단상'으로, 장정일이라는 작가의 단상들을 모아 놓은 일종의 수필집이다.

저자의 통찰과 그 통찰을 표현한 감칠맛 나는 글, 그 글속에 느껴지는 자유로움과 절제가 돋보이는 책이다.

 

첫 장을 넘기며 '컴퓨터'라는 제목의 단상을 보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 글을 읽으며 나는 작가와 동질감을 느꼇나 보다. 과거에 내가 부수었던 많은 전자제품들이 머리속을 스쳐 지나갔다. 첫 장부터 작가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ㅎㅎ

세 번째 구입한 노트북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앞서 사용한 두 대의 운명은 이러하니, 첫 번째 노트북은 한밤에 마감에 쫓게 글을 쓰다가 커서가 움직이지 않길래 잔뜩 열화가 뻗친 상태에서 주먹으로 책상 위의 그놈을 쾅쾅 쳐서 두들겨 부셨다. 다음 날 아침가지 갖다 주어야 하는 마감 원고는 '핸드 프린트'로 만들었다. 그리고 용산전자상가에 가서 한 140만 원 돈을 주고 새 노트북을 샀는데 한 일주일 정도 지나서 첫 번째 노트북을 두들겨 부술 때와 똑같은 사용 미숙으로 제대로 작동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주먹으로 쾅쾅 치려다가 머리에 얼핏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전에는 주먹으로 깨부쉈으니 이번에는 발로 한번 밟아 봐야지." 열화가 뻗친 상황에서 전원 코드와 프린트기 코드를 뽑고 나서 두 손으로 정중히 들어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그 동작을 하면서 다시 떠오른 생각. "히야, 내가 이렇게 이성적이고 차분할 수 있다니!" 그리고 풀쩍 뛰어서 콱 밟았다. 요 몇 년간 심심찮게 회자되는 말로 "IMF가 사람 여럿 만들었"는 말이 있다. "옛날 같았으면" 하고 눈을 흘기는 일은 있지만 이제는 노트북을 두들겨 부술 엄두를 못 낸다. 대신 오매불망하는 내 소망을 노트북은 이루어 준다. 옳게 인용했는지는 심히 저어되나 "똥이 더러워서 피한다는 말은/ 똥이 무서워서 피한다는 내 마음속의/ 한숨과 같은 것이었으니" 했던 누구의 시구처럼, 노트북이 무서워서 뚜껑을 꼭 쳐 닫고 될 수록 글 쓸 기회를 갖지 않는다.

 

그리고 동업의 문학인들에게 하는 따끔한 한마디가 와 닿는다. 다른 분야도 이와 마찬가지로, 마치 확고한 의식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만 앞서는 허세들이 많기 때문에 더욱 와닿나 보다.

사회의 어떤 분야에든 무임승차는 있다. 하지만 지식인들, 그 가운데서도 시나 소설을 쓰는 사람들이 아무런 시민운동 단체에 몸담고 있지 않은 채 사회적 사안이 생길 때마다 양심가인 양 짧은 글을 신문에 써 대는 형태는 좋지 않다. 그래서 이런 말도 들린다: "시인이 여론 지도층이나 사회 감시자인 양 하는 꼴은 우습기 짝이 없는데다가, 과대망상 증상마저 보인다. 스님이 스님이듯, 시인은 시인이다."

퇴물 탤런트나 영화배우가 인기를 등에 업고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것이 눈꼴사납듯이 문인들이 사회의 치부를 향해 감놔라 배놔라 라고 말하고 싶거든, 시민운동 단체에서 발로 뛰어야 한다. 여기에 무임승차는 없다. 그래야 설득력을 얻는다. 그런 점에서 안티조선일보 등의 단체에서 활약하는 몇몇 문인들이 존경스럽다.

 

밤샘형 인간이 사회적 틀에 짜맞추어진 아침형 인간보다 못할 것 없다는, 오히려 더 천재적일 수 있다는 다음의 글은 이른 시간에 잠자리에 들지 못하는 나에게 가벼운 미소와 위안(?)이 되어 주지만 창조적이지도 천재적이지도 못한 나 자신이 못내 아쉽다.

'아침형 인간' 이란 말이 유행할 때, P. 브르노가 쓴 "천재와 광기"가운데 나오는 다음의 대목을 우연히 발견하고 웃었다: "또 다른 탈주의 방법으로서 수면의 리듬을 바꾸는 것은 사회적 고립의 가장 좋은 수단들 가운데 하나이다. 오늘날 우리가 '앞섬' 또는 '단계의 늦음'이라 일컫는 것은 이렇게 이해될수 있다. 우리의 내적 시계는 취침과 기상 시간에서 조금의 변화밖에 용납하지 않는 커다란 규칙성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거나 단계가 늦는 경우, 일상적으로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이때 몇 시간 앞서거나 늦는 것이다. 단계가 앞선 것은 20시나 21시로 잠을 앞당기는 것에 해당하는데, 이것은 오히려 사회질서에 극도로 순응하거나, 삶의 어려움에 복종하거나, 아니면 잠 속으로 도피한다는 징후이다. 반대로 단계가 늦는 것은 밤을 지새우며 밤에 어떤 활동을 추구하고, 매우 늦게 또는 새벽에 잠자리에 들고 낮에 잠을 자는 것으로 표현되는데, 이것은 사회생활의 리듬과 양립하기 어려울 뿐이다. 이때 낮(깨어 있음)과 밤(잠) 사이클이 뒤바뀌게 되는데, 이것은 다분히 비사화적 행동의 표시이며, 낮에 활동하고 밤에 잠을 자기를 원하는 사회질서에 불복한다는 표시이다. 단호한 의지나 어떤 필요성에 의해, 많은 창조자들이 영감을 되찾기 위해 밤의 침묵이나 불면의 순간을 이용하며 단계의 늦음을 나타낸다 [...] 밤의몽상가들이 사는 이 낯선 세계에서, 우리는 저녁때 깨어나 새벽에 잠드는 원초적이고 몽유병적이며 신경쇠약 증세를 나타내는 목신을 만난다. 여기에 모든 위대한 창조자들과 예외적 존재들이 있다. 여기에 내일의 세계를 만든느 사람들, 잠을 자는 동안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 맞다. 그렇다! 우리는 절대 상상하지 못한다. 아침 일찍부터 오선지를 펼쳐 놓고 작곡을 하노라고 머리를 쥐어 짜는 모짜르티를, 아침 일찍부터 중요하나 실험을 하겠다고 부산을 떠는 레오나르도 디빈치를, 아침 일찍부터 시를 쓴답시고 이부자리에 업드려 대학노트를 펼치는 이상을! 평생 고용주의 노예로 살기로 작정한 사람만이 일찍 일어난다.

 

 

고정 비율의 책의 인세를 위조지폐로 비유한 독창성이 돋보인다. 나 역시 한 권의 기술서적을 쓰고 10%의 인세를 받아 본적이 있어 더욱 와닿는 비유이며 특히 마지막 부분 "지폐이긴하나 지폐에 일관적으로 담긴 통상적 가치가 아닌 독자적인 의미와 가치를 통용시키는" 이라는 표현은 참으로 멋진 말이다.

통상 작가의 인세는 책값의 10%다. 다시 말해 8,900원의 정가가 매겨진 "생각"이 한 부씩 팔릴 때마다 나는 890원씩을 챙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나는 한국은행의 허락 없이 890원짜리 지폐를 공공연히 제작하고 통용시켰으므로, 가련한 위조지폐범에 불과하다. 아아, 장안의 지가를 올린다는 말이 무슨 뜻이드뇨? 깜쪽같이 위조에 성공했다는 말이 아니던가? 정말이지 나는 아주 젋었을 때부터 글쓰기가 범죄와 같다고 느끼곤 했는데, 나의 죄목은 위에 적시한 그대로다. 책상 앞에 오랜 시간 동안 웅크리고 앉아 위조폐를 그리는(쓰는) 나와 같은 창백한 범죄자들은 그러나 참 용케도 자신의 죄의식을 무마하거나 극복하며 살아왔다. 이 당당한 위조지폐범들은, 한국은행에서 지폐를 찍듯이 만들어 놓은 통상적인 의미나 규범적인 가치가 아닌, 독자적인 의미와 가치를 통용시키려고 한다는 점에서, 당당한 위조지폐범들이다. 작가란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화폐질서와, 화폐질서만큼 공고한 체계 의식을 조롱하고 전복하는 위조지폐범이다.

 

저자가 자신의 신념과 정체성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다음의 편지라는 글에서 겸손이라고 볼 수도 있겠는데 내가 보기엔 겸손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글과 자신의 신념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진심어린 거절(들)이었을 것이다. 우리 같은 세속 기준에 찌든 영혼들은 감히 알 수 없는 그런 훌륭한 기준일 것이다.

세 편의 편지를 보며 멋진 사람이구나 한다.

편지

안녕하세요. 장정일입니다.

귀사가 기획하신 "꼭 읽어야 할 시 369"에

제 작품을 선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제 시는 '꼭 잃어야 할' 그런

작품이라고 생각되지 않아, 수록을 절대 거절합니다.

2004.4.20

 

편지(2)

안녕하세요. 저는 '2005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 조직위원회'가 벌이는 순회작가단 사업에 선정된 소설가 장정일입니다.

저를 작가단에 선정해 주신 선정위원회의 배려는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평소에 가지고 있는 저의 개인적 신념('작가는 작가들끼리 떼 지어 다녀서는 안 된다' 등등의, 저 아닌 그 누구에게도 강요될 필요가 없는 오로지 개인적인 신념)에 의거하여, 작가단에 선정되는 것을 사양합니다.

귀 위원회에서 보낸 공문을 방금 읽은 바에 의하면, 곧 '개별 행사의 구체적 일정'을 확정한다고 하더군요. 한시라도 빨리 저의 의사를 밝혀 드려야 구체적 일정을 짜는 데 착오가 없을 것 같아서 이메일을 보냅니다. 제가 사양한다고 해서, 아예 인원을 한 사람 누락시키는 일 없이, 보다 젊고 훌륭한 작가와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도서전 주빈국으로서의 임무가 완수되기를 빕니다.

2004.12.20

 

편지(3)

안녕하세요. 장정일입니다.

어머니와 광훈 씨에게서 한윤정 님이 저의 연락을 기다린다는 말을 몇 번 이나 전해 들었습니다. 실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연락을 드리지 못했던 것은 바쁘거나 잊어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뻔해 보이는 '원고청탁'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글 쓰는 사람은 글을 써야 먹고 사는데 저는 글쓰는 게 너무 싫거든요. 집에 돈이 있으면, 보기 좋게, 일언지하에 거절해 보련만, 목구명이 포도청이라 막상 연락이 닿고 나면 갈등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래서 연락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한 기자님이 기획하신 "내 소설 속의 사람"은 그 의도가 참 흥미로우며, 그 "기획" 속에 저를 끼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청탁에 응해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소파에 길게 몸을 뻗고 누워 음악을 들으면서 다른 사람이 쓴 책을 읽고 있으면, 제가 지금 글을 쓰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또 제가 글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 행복하고 위안이 되거든요

2004.4.15

 

그리고 저자는 음주운전을 신상공개가 필요한 수준의 매우 파렴치한 범죄로 보고 있다.

것은 평소 내 의견과도 일치하는 부분이라 발췌해 본다. 만취한 사람이 모는 차는 출발하는 것과 동시에 거대한 살상 무기가 되며, 그 행동을 서슴없이 반복하는 자들은 모두 살인미수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얼마나 귀한 생명들이 음주라는 (사고 당사자와는 하등 관련이 없는) 하찮은 일에 봉변을 당하고 살인이 아닌 사고 희생자로 주목도 받지 못한단 말인가...

음주 운전자들에겐 죄의식이 없다. 사고 후에 뺑소니만 치지 않는다면, 그 행위는 그저 단순한 교통 사고에 속한다. 이 비인륜적 범죄는, 그저 벌금이나 내고 피해자와 합의만 보면 해결이 되는 금전적인 문제로 차츰 축소되었다. 한 사람의 무절제와 기분 때문에 한 가정이 파괴되고도 사후 처리가 보험회사의 소관으로 끝난다면 이 문명 사회란 헛것이다. 그래서 공무원 범죄와 음주 운전자의 신상공개가 널리 이루어져야 한다. 이중처벌이 어차피 위헌인 바에야, 10대 매매춘 범죄자들만이 그 부당함을 뒤집어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독서관으로 마무리한다.

보혁갈등이 첨예하게 부딪치는 지난 몇 년간을 보내면서, 나의 독서관은 개인적이고 내밀한 쾌락을 좇아가는 독서에서 약간 다른 것으로 진화했다. 민주 사회란 여러 가지 의견이 존재하는 사회다. 때문에 시민이란 타인의 의견과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과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그것과 함께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이렇게 말하고 다닌다. 시민은 책을 읽는 사람이라고!

시민이 책을 읽지 않으면 우중이 된다. 책과 멀리 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사회 관슴의 맹목적인 신봉자가 되기 십상이고 수구적 이념의 하수인이 되기 일쑤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내밀한 정신의 쾌락을 놓치는 사람일 뿐 아니라, 나쁜 시민이다. 독서는 논수이나 수능을 잘 치르기 위해서 필요한 것도 또 교양이나 정보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독서는 민주 사회를 억견과 독선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시민들이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좀 과격한 독서론일지는 모르겠으나 요 몇 년 동안 내가 도달한 생각은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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